타임아웃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드리지요.

스물한 살 오타케 유토씨는 2020년 5월 20일에 좌절했다. 그의 꿈은 ‘여름 고시엔’에서 야구를 하는 거였다. 고시엔은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에 있는 일본프로야구 한신 구단의 홈구장이다. 1924년 갑자년에 완공돼 고시엔(甲子園)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를 흔히 ‘여름 고시엔’이라고 한다. 일본 고교 야구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출전하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다. 당시는 코로나19가 모든 대회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름 고시엔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오타케는 일곱 살 때부터 야구를 했다. 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고시엔만 바라보고 운동했다”고 했다. 투타 겸업의 야구 천재 오타니 쇼헤이(29·LA에인절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고시엔을 목표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하니, 시작은 오타니보다 빨랐다. 약 4000개의 고교 야구팀이 지역예선을 벌이고 여기서 살아남은 49개 팀이 고시엔에서 승부를 겨룬다. 경기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차고, 공영방송 NHK는 모든 경기를 생중계한다. 평균 시청률이 20%를 훌쩍 넘는다고 한다. 한국의 고교 야구도 한 때는 그랬다. 그러나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하고 직업 야구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열광하면서 고교야구의 인기는 급격히 시들었다. 고교 야구의 메카였던 동대문구장을 철거(2008년)하는 최악의 해프닝 이후 한국 고교야구는 변두리 구장을 전전한다. 아마추어는 프로의 젖줄이다. 관중이 등 돌리고 있는 지금 한국의 프로야구는 이때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일본이 고교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부럽기도 하다.

일본 고교 야구인에게도 고시엔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들의 꿈은 대학 입학이나 명문 구단 입단이 아니라 고시엔의 흙을 한 번이라도 밟아보는 것이다. 그 간절함을 알기에 승자는 패자 앞에서 오래 기뻐하지 않는다. 인사할 때 승자가 패자보다 허리를 더 많이 숙인다. 오타니는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과 대만을 격파한 뒤 말했다. “한국도 멋진 야구를 하는 선수들이 있다. 한국과 대만 역시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오타니가 진 팀을 배려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던 건 고시엔에서 배운 건지 모른다. 진 팀 선수들은 고시엔의 흙을 퍼 고향에 가져간다. ‘내년에 다시 와서 흙을 돌려주겠노라’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꿈의 무대’가 무산된 거다. 일본고교야구연맹이 ‘여름 고시엔’ 취소를 발표했을 때 16만 일본 고교 야구인들은 절망했다. 고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오타케는 더욱 그랬다. 오타케의 아버지도 야구를 했었다. 고시엔에 대한 그의 간절함은 자신의 꿈에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더한 만큼이었다. 휴일마다 아버지와 캐치볼 훈련을 했다. ‘스포츠 추천’ 전형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해 준비한 꿈의 무대가 한 순간에 날아갔다. 고시엔이 무산된 건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42~1945년이 유일했다. 75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다가 하필 마지막 기회에 무산되다니. 오타케가 말했다.

“목표가 사라지자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졌어요.”

결국 야구를 그만뒀다. 이듬해인 2021년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을 하면 아버지처럼 자영업을 할 생각이었다. 자영업자는 꿈이 아니라 그냥,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친구들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야구 얘기를 했다. 허망하게 사라진 꿈이라 더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다 순간, 결심한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고시엔의 흙을 밟고야 말겠어. 열정만 있다면 꿈은 언젠가 다시 이룰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

그리고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타케는 2020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하려던 선수들을 수소문했다. 지인을 동원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했다. 그 누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46개팀 1000여명의 전직 고교 야구 선수들이 출전하겠다고 했다. 선수단 재구성이 여의치 않은 일부 팀은 합동 팀을 꾸리겠다고 했다. 기업 후원 같은 것도 받지 않았다. 운동장 대여료, 선수 교통비 등 모든 비용은 온라인 소액 후원으로 모았다. 이 말은 즉, 선수와 팬 모두 마음속에 같은 꿈을 가지고 있던 거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그 여름을 되찾자’다. 고시엔은 지역예선과 본선까지 10경기 이상을 연속으로 이겨야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다. ‘여름 고시엔’에 마지막으로 출전한 고교 3학년 선수가 경기에서 지면 ‘여름이 끝났다’고 한다. 이 표현을 ‘여름을 되찾자’로 바꾼 거다. 전직 고교 야구인들은 여름을 되찾기 위해 예전에 땀 흘렸던 유니폼을 옷장에서 다시 꺼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라졌던 고시엔의 꿈을 다시 찾은 올드보이(OB)들의 간절함이 현역에 뒤지지 않을 거란 사실은 분명하다. 경기는 오는 11월 29일에 열린다. 그날, 고시엔 구장을 밟는 이들의 가슴은 얼마나 벅찰까.

3년 전 오타케처럼 허무하게 꿈이나 열정을 잃은 이들을 주변에서 자주 마주한다. 이 중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좌절한 이들도 수두룩하다. 입시경쟁에 지친 수험생, 아무리 두드려도 좀처럼 취업문이 열리지 않는 취준생, 조직생활의 현실을 깨닫고 열정을 잃어버린 신입사원, 꼰대 취급에 상처받은 팀장, 사랑에 실패한 청춘,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신혼부부…. 아무리 손을 뻗어도 가닿지 않은 것들에 우린 또 좌절하고, 우리의 삶은 매미가 벗어 놓은 허물 같아질 때가 많다.
일본의 만화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H2’는 수많은 만화 매니아들이 전설로 꼽는 야구 만화다. 주인공 ‘히로’는 중학 야구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여름 고시엔’의 꿈을 단념하고 야구부가 없는 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에게 야구 불가 진단을 내린 의사가 돌팔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히로는 축구부를 탈퇴하고 야구서클로 옮긴 뒤 시합에서 만루홈런을 때리면서 말한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드리지요.”

우리도 한때는 뜨거웠었다. 그 여름을 되찾자. 우리 꿈과 열정엔 타임아웃이 없다. 지금은 열세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시합은 몇 번이고 뒤집어진다. 설령 졌다 해도 시합은 한 경기가 끝이 아니다. 입시, 취업, 조직생활, 사랑…. 싸워야할 상대도 여럿이다. 내 집 마련 빼곤 다해볼 만한 상대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거다. 옷장에 깊숙이 넣어뒀던 유니폼을 꺼내자. 좌절은 금지다. 있는 힘껏 풀스윙을 휘둘러보자.

국민일보 산업2부 이용상 기자
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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