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갑을’없는 산업에서 살아남기

진정한 상생이란 영원한 ‘갑을(甲乙) 관계’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도움을 주고받음이 일방적인 관계에서 ‘다 같이 잘 살자’는 의미의 상생을 외쳐봐야 미사여구에 그친다.

코로나19 이후 최근 2년간,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에 접어든 지금, 산업 생태계에서의 갑을이 바뀌는 장면을 여럿 목격했다.

대표적인 게 물류업계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등 화주들은 선사·포워더 등에 대한 갑의 입장에 있었다.

선사들이 운임 인상의 필요성을 호소해도 협조를 거부하거나, 심할 경우 거래를 끊겠다는 식의 위협을 직간접적으로 가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늘어난 해상운임 부담을 화주에게 적용하지 못해 손실을 떠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코로나 이전 해운경기가 침체를 면치 못했던 약 10년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해운 경기가 강세로 돌아서며 전세가 역전됐다. 코로나19로 억눌렸던 수요가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경기부양책 시행과 함께 터져 나온 영향이다. 갑작스레 급등한 수요는 공급망 병목 현상 등의 차질을 빚었고, 이는 높은 운임 가격으로 이어졌다.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최근 경기침체가 시작되기 전까지 사상 최고치를 계속 경신했다.

하지만 화주들은 웃돈을 내고도 배를 잡지 못해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중소형 화주들은 물론이고 대기업들조차 어려움을 토로했다. 장기계약을 맺은 외국 해운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거래처에 물건을 보내야 했던 수출기업들은 제대로 된 항의조차 못했다.

갑을이 바뀌는 모습은 자동차 업계에서도 나타났다. 완성차 기업과 배터리 기업의 이야기다. 세계적인 친환경 탄소중립 트렌드와 미국의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의 빠른 성장이 가져온 전동화 바람은 배터리 업체의 위상을 한없이 드높이고 있다.

독일의 폭스바겐, 미국의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차를 팔고 싶어도 배터리가 없으면 차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자, 배터리 업체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 2020년부터 르노그룹을 이끌고 있는 루카 데 메오 회장은 지난 10월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최고경영진을 직접 만나고 갔다. 비슷한 시기 GM에서는 최고위급 임원 중 한명인 실판 아민 수석 부사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 역시 한국의 배터리 업체들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한국 출범 20주년 기념 매일경제 기고를 통해 “GM은 2018년에 발표한 경영 정상화 계획의 부분으로 두 차종의 글로벌 신차를 부평·창원에서 생산하기로 했다”며 “GM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새롭게 직면하고 있는 도전 과제들을 극복하고 한국 사업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할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또 다른 흥미로운 현상은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기업 간 합작사 설립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미국 GM의 합작법인인 얼티엄셀즈는 최근 전기차 배터리 양산을 시작했다. 국내 배터리 업체와 미국 완성차 업체 합작사가 본격적인 배터리 상업 생산에 돌입한 첫 사례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일본의 완성차 업체인 혼다와도 미국 오하이오주에 합작 배터리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 회장과 핵심 임원이 직접 배터리 업체를 찾아간다? 세계 완성차 기업과 배터리 기업이 합작사를 세운다? 그것도 50대 50 지분으로? 전동화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새로운 산업 권력 지형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러다보니 내연기관 시대에 엔진을 직접 만들었듯, 전기차 시대에도 배터리를 직접 만들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슈퍼갑’을 만들 뿐이다. 이미 포스코케미칼처럼 배터리 핵심소재인 양·음극재를 동시에 생산하는 기업들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뒤바뀐 갑을 관계는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도 목격된다. 삼성전자·애플 등 완성품 업체가 기존의 갑이었다면, 완성품 업체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LG디스플레이 같은 디스플레이 제조사들의 몸값이 올라가는 경우가 생겼다. 일본 전자산업의 몰락에 디스플레이 산업이 오랜 기간 침체기를 겪다보니, 고품질 디스플레이를 제조할 수 있는 회사가 없다보니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갑을 관계 변동의 역사를 돌아본 뒤, 상생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훨씬 더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친환경·디지털화·첨단 신기술의 등장 그리고 이들 트렌드들의 가속화 속에서 산업 권력 또한 수시로 재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낙오되는 기업들은 어떤 곳이 될까. 뒤바뀐 갑을 관계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기업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예상한다.

인간관계에 대입해보자. 본인이 팀장이었던 시절 막내 팀원으로 입사한 후배가 있다고 가정하자. 당시에는 조직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질 못해 잔심부름이나 했는데,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그 후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주특기가 엄청 각광을 받게 됐다. 막내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본인 보다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그럴 때 여전히 옛날 시절이나 떠올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본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후배에게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는 결국 조직 내에서 잊힐 것이다.

수시로 뒤바뀌는 산업 권력은 당사자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겠지만, 산업 전반과 더 나아가 국가 경제적으로 봤을 때는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상생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가짐과 과거 영광에 미련을 갖지 않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이유섭 매일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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