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일선과 문제의 중심에 리더가 서야 한다



위기의 일선과 문제의 중심에 리더가 서야 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찾아낸 이순신 리더십

위기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제 바뀐 업무환경으로 인해 리더십의 중요성이 다시 얘기되고 있다.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소통방식의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 감 역시 리더십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다.
이에 불안한 구성원들을 하나로 모을 리더십의 기본원칙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찾아보았다.
글. 편집실


질책에 앞서 해결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다


1597년 7월 16일, 왜군은 원균의 함대(160척)를 칠천량해전에서 기습공격으로 궤멸시켰다. 조선 수군 주요 지휘관이 전사했고,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던 원균은 육지로 도주하다가 적의 추격을 받고 전사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전선 10여 척을 끌고 탈출했는데, 이는 조선 수군의 마지막 남은 전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전멸이나 마찬가지인 조선 수군을 2개월 만에 재건시켰다. 그리고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격파하며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력도 부족하고 사기도 바닥을 쳤을 텐데, 무엇이 반전을 일으킨 것일까? 『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일기에 그 답이 나와 있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크게 패했다”고 하였다. 듣자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안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기뻐하였다.


이 일기는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 할 때 합천 초계에서 쓴 일기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바로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이다. 보통 위기에 처하면 리더는 멀리에서 참모들의 보고를 받은 후 그곳에서 돌파구를 찾을 방법을 고민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현장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현장에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도 현장에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모든 과정에 함께하다


실제 이순신은 현장에 갔고, 그곳에서 정말로 문제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수군들이 칠천량전투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직접 전라도 연안 일대를 돌며 성을 구축하고 군사와 군량미를 모았다.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피난 갔던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이순신과 함께하면 패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사기와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군량을 훔쳐 달아나는 관리가 있었는데 본보기로 목을 베어 효시했다. 또 왜적이 왔다는 허위경보를 알리며 소를 훔쳐 달아나는 사람을 붙잡아 역시나 목을 베고 효시했다.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자를 엄정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2개월 만에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수준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의 현장에 모든 것을 지휘하는 리더가 중심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위기가 닥치면 리더는 그 중심에서 진두지휘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책임 있는 리더가 실무자들과 함께하면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원칙이 지켜지기 때문에 더 빠른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선 강력한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리더가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불과 13척으로 2개월 후 133척의 왜군을 격파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1597년 9월 15일과 9월 16일의 일기에 나타나 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하였고, 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構千夫)’” 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진도대교 울돌목(명량) 부근에는 ‘고뇌하는 이순신 상’이라는 제목의 동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칼이 아니라 지도를 들고 있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전력상으로 불리한 상황을 인정했다. 그래서 수시로 정탐선을 보내 적의 이동 상황을 수집하며 예상 이동로를 판단했다. 그리고 울돌목에서 지도를 보며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울돌목의 협소한 지형과 급류를 이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이다. 이것이 이순신의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는 전략’이다. 즉, 이순신에겐 의지만이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바꿀 강력한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열심히 해보자는 파이팅이 아니라, 진짜 가능성 있는 방법으로 장수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누구나 이런 저런 방법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구성원들에게 리더의 전략은 더욱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실제 명량해전에서 그는 지형과 물살을 이용해 왜군보다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는데, 그 가능성에 수군들은 희망을 발견했을 것 이다.


가장 먼저 움직이고 자신의 말을 실천하다


그러나 마지막 대격전의 순간. 이순신은 다시 한번 절망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는 조선 수군의 대장선에 타고 제일 앞에 나서 싸웠는데, 막상 격전지에 오자 나머지 12척이 따라오지 않고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했던 기억과 죽어가던 동료들의 모습이 수군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모습을 이순신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별망군(망을 보는 군인)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을 친 곳을 향해 온다”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게 하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들을 에워쌌다.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하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서 앞으로 돌진하여 각종 총통을 이리저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 같았다.


이순신은 그런 모습에 크게 노했지만 선봉에서 모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외침을 직접 실천했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왜군에 맞서 전략을 펼치며 포탄을 터뜨리면서 왜군을 위기에 몰아 결국 제일선에서 방심하고 있던 왜군 대장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 전세가 역전되자 뒤로 빠져 있던 나머지 12척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이후 그들 역시 이순신처럼 죽을 힘을 다해 전투를 치렀다. 리더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제일 처음이 되어야 한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사사로운 개인의 영달을 꾀한다면 반드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돼 있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은 막강했던 이순신의 함대를 가지고도 개인의 안위, 소통과 전략의 부재로 함대를 전멸시켰다. 반면, 이순신은 사기가 떨어진 수군을 데리고 비할 바 없는 전력으로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다. 리더는 전략가이자 실행가가 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행동이 곧 기업의 생존과 직결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21.03.01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찾아낸 이순신 리더십

위기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제 바뀐 업무환경으로 인해 리더십의 중요성이 다시 얘기되고 있다.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소통방식의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 감 역시 리더십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다.
이에 불안한 구성원들을 하나로 모을 리더십의 기본원칙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찾아보았다.
글. 편집실

질책에 앞서 해결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다

1597년 7월 16일, 왜군은 원균의 함대(160척)를 칠천량해전에서 기습공격으로 궤멸시켰다. 조선 수군 주요 지휘관이 전사했고,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했던 원균은 육지로 도주하다가 적의 추격을 받고 전사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전선 10여 척을 끌고 탈출했는데, 이는 조선 수군의 마지막 남은 전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전멸이나 마찬가지인 조선 수군을 2개월 만에 재건시켰다. 그리고 13척으로 133척의 왜군을 격파하며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력도 부족하고 사기도 바닥을 쳤을 텐데, 무엇이 반전을 일으킨 것일까? 『난중일기』 1597년 7월 18일 일기에 그 답이 나와 있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왜군의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크게 패했다”고 하였다. 듣자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안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매우 기뻐하였다.

이 일기는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 할 때 합천 초계에서 쓴 일기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바로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이다. 보통 위기에 처하면 리더는 멀리에서 참모들의 보고를 받은 후 그곳에서 돌파구를 찾을 방법을 고민한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현장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현장에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도 현장에 있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모든 과정에 함께하다

실제 이순신은 현장에 갔고, 그곳에서 정말로 문제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수군들이 칠천량전투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직접 전라도 연안 일대를 돌며 성을 구축하고 군사와 군량미를 모았다.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피난 갔던 백성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이순신과 함께하면 패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사기와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군량을 훔쳐 달아나는 관리가 있었는데 본보기로 목을 베어 효시했다. 또 왜적이 왔다는 허위경보를 알리며 소를 훔쳐 달아나는 사람을 붙잡아 역시나 목을 베고 효시했다.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자를 엄정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2개월 만에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수준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의 현장에 모든 것을 지휘하는 리더가 중심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위기가 닥치면 리더는 그 중심에서 진두지휘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책임 있는 리더가 실무자들과 함께하면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원칙이 지켜지기 때문에 더 빠른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선 강력한 전략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리더가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불과 13척으로 2개월 후 133척의 왜군을 격파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1597년 9월 15일과 9월 16일의 일기에 나타나 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하였고, 또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構千夫)’” 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진도대교 울돌목(명량) 부근에는 ‘고뇌하는 이순신 상’이라는 제목의 동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칼이 아니라 지도를 들고 있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전력상으로 불리한 상황을 인정했다. 그래서 수시로 정탐선을 보내 적의 이동 상황을 수집하며 예상 이동로를 판단했다. 그리고 울돌목에서 지도를 보며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울돌목의 협소한 지형과 급류를 이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 이다. 이것이 이순신의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는 전략’이다. 즉, 이순신에겐 의지만이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바꿀 강력한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열심히 해보자는 파이팅이 아니라, 진짜 가능성 있는 방법으로 장수들을 이끌었던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누구나 이런 저런 방법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구성원들에게 리더의 전략은 더욱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실제 명량해전에서 그는 지형과 물살을 이용해 왜군보다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는데, 그 가능성에 수군들은 희망을 발견했을 것 이다.

가장 먼저 움직이고 자신의 말을 실천하다

그러나 마지막 대격전의 순간. 이순신은 다시 한번 절망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는 조선 수군의 대장선에 타고 제일 앞에 나서 싸웠는데, 막상 격전지에 오자 나머지 12척이 따라오지 않고 도망갈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했던 기억과 죽어가던 동료들의 모습이 수군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모습을 이순신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별망군(망을 보는 군인)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을 친 곳을 향해 온다”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게 하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들을 에워쌌다.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하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서 앞으로 돌진하여 각종 총통을 이리저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 같았다.

이순신은 그런 모습에 크게 노했지만 선봉에서 모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외침을 직접 실천했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왜군에 맞서 전략을 펼치며 포탄을 터뜨리면서 왜군을 위기에 몰아 결국 제일선에서 방심하고 있던 왜군 대장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 전세가 역전되자 뒤로 빠져 있던 나머지 12척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이후 그들 역시 이순신처럼 죽을 힘을 다해 전투를 치렀다. 리더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제일 처음이 되어야 한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사사로운 개인의 영달을 꾀한다면 반드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돼 있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은 막강했던 이순신의 함대를 가지고도 개인의 안위, 소통과 전략의 부재로 함대를 전멸시켰다. 반면, 이순신은 사기가 떨어진 수군을 데리고 비할 바 없는 전력으로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다. 리더는 전략가이자 실행가가 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행동이 곧 기업의 생존과 직결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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