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문화에서 세계를 사로잡는 영향력까지



신기한 문화에서 세계를 사로잡는 영향력까지

영화의 역사

영화는 오락적, 예술적, 산업적 성격에 따라 무비(movie), 필름(film),
시네마(cinema) 등으로 다양한 명칭을 가지는데, 한국에서는
활동사진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에 ‘영화’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유입돼
쓰이기 시작한 뒤 현재에 이르렀다. 비출 영(映), 그릴 화(畵).
지금까지 영화가 무엇을 비추고 그것을 어떻게 그려 왔는지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글. 편집실

1분짜리 영상물로 영화의 시작 알린 뤼미에르 형제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 위치한 카페에서 그들이 발명한 네마토그래프로 찍은 1분여의 영상물 10편가량을 모아 유료 상영한 날이 영화의 탄생일로 공인돼 있다. 이때 상영된 영화 중에는 공장에서 퇴근하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기차가 도착하는 순간을 포착한 <열차의 도착>이 있다. 영상을 보던 관객 일부가 역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현실로 착각해 몸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이는 낯선 문화였다.

여느 발명품들처럼 영화 역시 과학혁명, 기술혁명,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거쳐 탄생한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탄생의 바탕에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축적된 잔상효과의 발견, 사진 및 환등기의 발명, 도시화와 산업화의 도래 등이 자리하고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배경이 공장이나 기차역이었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주도권을 선점한 이가 뤼미에르 형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 커다란 스크린 위에 이미지를 영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영화 상영은 커다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후 영화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영상매체이자 문화 산업 및 오락 장르로서 20세기를 풍미하게 된다.

시스템과 기술로 세계영화 시장 장악한 할리우드

탄생 직후 영화는 상영길이를 늘리고 기술 발전을 도모 하는 한편, 다양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며 저변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910년대에 이르러 장편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온화한 날씨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가 형성됐으며, 메이저 영화사들이 스튜디오 시스템, 장르 시스템, 스타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 등 대작 역사물이 폭넓은 반향을 일으키며 파급력을 키워갔다. 이후 할리우드는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고 찰리 채플린, 험프리 보가트,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세계영화의 유행을 이끌었다. 특히 발성영화, 컬러영화, 입체영화, 와이드화면, 특수촬영 등을 통해 영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현재까지도 선도해오고 있다.

예로, <재즈 싱어>(1927)가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제작돼 흥행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토키(talkie) 시대를 열었고, 한동안 뮤지컬영화의 강세가 이어진 바 있다.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된 뒤에는 <성의>(1953)를 계기로 와이드화면의 일종인 시네마스코프영화가 기존 극장 스크린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죠스>(1975)를 필두로 블록버스터가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했으며, 1980년대에는 <터미네이터>와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등을 통해 SF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할리우드에 맞서기 위한 세계 각국의 예술적 지향

이렇듯 영화가 나름의 표현기법과 미적 체계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예술적 지위 역시 갈수록 높아졌다. 이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향을 흡수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을 시초로 한 표현주의 영화, <나폴레옹>(1927)으로 정점에 오른 인상주의 영화, <안달루 시아의 개>(1929)를 위시한 초현실주의 영화, <안개 낀 부두>(1938)와 <자전거 도둑>(1948)으로 대표되는 시적 리얼리즘 영화 및 네오 리얼리즘 영화 등이 20세기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며 세계영화사를 수놓았다.

이에 1911년, 시인이자 영화이론가였던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건축, 회화, 조각, 음악, 연극, 문학, 무용에 이은 ‘제7의 예술’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할리우드영화에 맞서 자국의 영화 산업을 보호하고, 영상 미학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후세대의 성장과 실존주의, 새로운 현실 및 역사인식, 대항문화 등을 배경으로 영화의 예술적 경향이 더욱 특화됐다.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비롯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을 포함한 영국 뉴웨이브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이후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로 대변되는 뉴저먼 시네마 등을 경유하면서, 영화는 텔레비전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예술적 우위를 확보해 갔던 것이다. 이밖에 세계 각 지역 및 문화권에서도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져 예술성을 인정받았는데 베니스, 칸, 베를린 등에서 매년 개최되는 유수의 국제영화제가 주요 통로로 그 기능을 해오고 있다.

교육적·계몽적·정치적 방향성을 담고 제작된 영화들

또 영화는 초기부터 세계 각국에서 사회문제를 둘러싼 교육적·계몽적 역할을 해오기도 하고, 정치적 방향성을 갖기도 했다. 1920년대 소련영화는 <파업>(1924), <전함 포템킨>(1925) 등을 통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지향을 동시에 성취했고, 스탈린 시대에는 <차파예프> (1934)를 기점으로 사회주의 현실과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었다. 또 다큐멘터리영화로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1935)와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1938)도 있다. 이 작품들은 나치의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그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영화에 내재된 정치적 속성이 상업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발현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할리우드를 예로 들면, <록키>와 <람보> 시리즈의 주연 실베스터 스탤론의 강한 남성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은 대부분 1970~1980년대의 아메리카니즘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쯤에서 보는 한국영화 100년의 의미와 영화사의 미래

한국인에 의한 영상 제작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기록 영화 <경성 전시의 경>이 만들어져,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개된 게 시초다. 이후 한국영화는 식민지와 남북 분단, 한국전쟁 및 군부독재 등 시대적 배경 하에 세계적 수준에 한참 못미치는 활동을 이어가다, 민주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1990년대부터 새로운 정책적·산업적·문화적 환경이 조성되며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하며 2000년대 이후에는 작가주의와 장르 시스템이라는 양대 기반 위에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웰메이드 영화가 주류를 차지하게 됐고,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를 시작으로 천만관객 시대가 열린다. 또 최근에는 소재의 다양화, 장르 혼합화 현상이 두드러지며,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기록을 세우는 등 예술적·문화적 입지도 크게 키웠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한국영화사 100년도 그 의미를 달리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디지털 혁명과 코로나19 확산 등이 맞물리며 전 세계 영화계에도 변화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 보건대, 이 같은 상황은 영화에 있어 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기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특히, 영화 산업은 물리적 한계와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장르이기에, 영화사의 미래는 물론 한국영화의 미래 또한 더 큰 발전을 기대해 봄직하다.

2021.03.01

영화의 역사

영화는 오락적, 예술적, 산업적 성격에 따라 무비(movie), 필름(film),
시네마(cinema) 등으로 다양한 명칭을 가지는데, 한국에서는
활동사진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에 ‘영화’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유입돼
쓰이기 시작한 뒤 현재에 이르렀다. 비출 영(映), 그릴 화(畵).
지금까지 영화가 무엇을 비추고 그것을 어떻게 그려 왔는지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글. 편집실

 

1분짜리 영상물로 영화의 시작 알린 뤼미에르 형제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 위치한 카페에서 그들이 발명한 네마토그래프로 찍은 1분여의 영상물 10편가량을 모아 유료 상영한 날이 영화의 탄생일로 공인돼 있다. 이때 상영된 영화 중에는 공장에서 퇴근하는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과 기차가 도착하는 순간을 포착한 <열차의 도착>이 있다. 영상을 보던 관객 일부가 역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현실로 착각해 몸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이는 낯선 문화였다.

여느 발명품들처럼 영화 역시 과학혁명, 기술혁명,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거쳐 탄생한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탄생의 바탕에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축적된 잔상효과의 발견, 사진 및 환등기의 발명, 도시화와 산업화의 도래 등이 자리하고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배경이 공장이나 기차역이었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주도권을 선점한 이가 뤼미에르 형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 커다란 스크린 위에 이미지를 영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영화 상영은 커다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후 영화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영상매체이자 문화 산업 및 오락 장르로서 20세기를 풍미하게 된다.

시스템과 기술로 세계영화 시장 장악한 할리우드

탄생 직후 영화는 상영길이를 늘리고 기술 발전을 도모 하는 한편, 다양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며 저변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910년대에 이르러 장편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온화한 날씨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가 형성됐으며, 메이저 영화사들이 스튜디오 시스템, 장르 시스템, 스타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 등 대작 역사물이 폭넓은 반향을 일으키며 파급력을 키워갔다. 이후 할리우드는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고 찰리 채플린, 험프리 보가트,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세계영화의 유행을 이끌었다. 특히 발성영화, 컬러영화, 입체영화, 와이드화면, 특수촬영 등을 통해 영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현재까지도 선도해오고 있다.

예로, <재즈 싱어>(1927)가 최초의 발성영화로서 제작돼 흥행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토키(talkie) 시대를 열었고, 한동안 뮤지컬영화의 강세가 이어진 바 있다.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된 뒤에는 <성의>(1953)를 계기로 와이드화면의 일종인 시네마스코프영화가 기존 극장 스크린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죠스>(1975)를 필두로 블록버스터가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했으며, 1980년대에는 <터미네이터>와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등을 통해 SF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할리우드에 맞서기 위한 세계 각국의 예술적 지향

이렇듯 영화가 나름의 표현기법과 미적 체계를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예술적 지위 역시 갈수록 높아졌다. 이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향을 흡수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을 시초로 한 표현주의 영화, <나폴레옹>(1927)으로 정점에 오른 인상주의 영화, <안달루 시아의 개>(1929)를 위시한 초현실주의 영화, <안개 낀 부두>(1938)와 <자전거 도둑>(1948)으로 대표되는 시적 리얼리즘 영화 및 네오 리얼리즘 영화 등이 20세기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며 세계영화사를 수놓았다.

이에 1911년, 시인이자 영화이론가였던 리치오토 카누도는 영화를 건축, 회화, 조각, 음악, 연극, 문학, 무용에 이은 ‘제7의 예술’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할리우드영화에 맞서 자국의 영화 산업을 보호하고, 영상 미학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전후세대의 성장과 실존주의, 새로운 현실 및 역사인식, 대항문화 등을 배경으로 영화의 예술적 경향이 더욱 특화됐다.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비롯한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을 포함한 영국 뉴웨이브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이후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로 대변되는 뉴저먼 시네마 등을 경유하면서, 영화는 텔레비전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예술적 우위를 확보해 갔던 것이다. 이밖에 세계 각 지역 및 문화권에서도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져 예술성을 인정받았는데 베니스, 칸, 베를린 등에서 매년 개최되는 유수의 국제영화제가 주요 통로로 그 기능을 해오고 있다.

교육적·계몽적·정치적 방향성을 담고 제작된 영화들

또 영화는 초기부터 세계 각국에서 사회문제를 둘러싼 교육적·계몽적 역할을 해오기도 하고, 정치적 방향성을 갖기도 했다. 1920년대 소련영화는 <파업>(1924), <전함 포템킨>(1925) 등을 통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지향을 동시에 성취했고, 스탈린 시대에는 <차파예프> (1934)를 기점으로 사회주의 현실과 역사를 대중적으로 다루었다. 또 다큐멘터리영화로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1935)와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1938)도 있다. 이 작품들은 나치의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그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영화에 내재된 정치적 속성이 상업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발현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할리우드를 예로 들면, <록키>와 <람보> 시리즈의 주연 실베스터 스탤론의 강한 남성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은 대부분 1970~1980년대의 아메리카니즘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쯤에서 보는 한국영화 100년의 의미와 영화사의 미래

한국인에 의한 영상 제작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기록 영화 <경성 전시의 경>이 만들어져,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개된 게 시초다. 이후 한국영화는 식민지와 남북 분단, 한국전쟁 및 군부독재 등 시대적 배경 하에 세계적 수준에 한참 못미치는 활동을 이어가다, 민주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1990년대부터 새로운 정책적·산업적·문화적 환경이 조성되며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하며 2000년대 이후에는 작가주의와 장르 시스템이라는 양대 기반 위에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웰메이드 영화가 주류를 차지하게 됐고,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를 시작으로 천만관객 시대가 열린다. 또 최근에는 소재의 다양화, 장르 혼합화 현상이 두드러지며,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기록을 세우는 등 예술적·문화적 입지도 크게 키웠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한국영화사 100년도 그 의미를 달리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디지털 혁명과 코로나19 확산 등이 맞물리며 전 세계 영화계에도 변화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 보건대, 이 같은 상황은 영화에 있어 위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기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특히, 영화 산업은 물리적 한계와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장르이기에, 영화사의 미래는 물론 한국영화의 미래 또한 더 큰 발전을 기대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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