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빅 블러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코로나 팬데믹을 조용히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그러나 엔데믹이 보이고 터널의 끝에 와있는 2023년 요즈음 또 다른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위기 이후 또 위기. 이처럼 현재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는 신조어가 있다. ‘퍼머크라이시스’ (permacrisis): 우리말로 해석하면 ‘영구적인 위기’인 것이다. 영구적인 (permanent) + 위기(crisis)의 합병어이다.

퍼머크라이시스는 작년말 영국 더이코노미스(The Economist)가 픽업한 용어로 팬데믹 발생 이후 디글로벌라이제이션이 가속화되면서 물가 불안, 에너지 대란, 경기 후퇴 등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만성적 ‘위기’를 말한다. 모퉁이를 지나면 새로운 공포가 기다리고, 전례가 없는 대형 사건 뒤에 또 다른 대형 사건이 발생하는 고도의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사회, 즉 ‘위험사회’ (risk society)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이 고도의 불확실성과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원인 중 하나는 ‘빅블러’(Big Blur) 이다. 빅 블러란 1999년 미국 미래학자 스탠 데이비스와 크리스토퍼 메이어가 그들의 저서 ‘블러’에서 처음 사용해 파생된 용어로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고 있던 많은 경계선들이 희미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경계 융화’ 현상을 말한다.

과거 기술의 발전과 사회변화는 보다 장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 발전과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세계는 초연결사회로 변화했다. 이제는 첨단 기술과 사회환경 변화가 실시간적으로 소비자와 사회에 반영되고 그 영향은 지수함수적인 폭발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경계가 오늘 갑자기 허물어지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빅블러 현상을 아래 세 가지 영역에서 살펴보고 대응 전략을 생각해 본다.

첫째, 빅블러는 현재 지구인의 일(work) 과 성(geneder)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먼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회사와 일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일’과 ‘휴가’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있다. 소위 ‘워케이션’ (workcation: work + vacation)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워케이션은 20 여년 전부터 실리콘 밸리에서 시행되고 있는 근무양식이다.

실리콘 밸리의 시작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배이(Bay) 주변에서는 연봉 1억 3천만 원을 받는 개발자들의 거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글링해보면 2023년 1월 현재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1 bed 아파트의 월 임대료는 5000불 (640만원)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 10만불의 연봉으로 샌프란시스코나 산호세 일대에서 거주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떄문에 임원들을 제외한 일반 사원들은 자동차로 4~5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타호(Tahoe) 호수 인근 도시들에서 거주하면서 한 달에 2~3번 본사를 방문하고 나머지 업무는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같은 실리콘 밸리 업무 문화가 팬데믹 기간 중 전 세계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고, 일부 회사에서는 기본 스타일로 정착되고 있다.

일과 휴가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1995년 이후 출생한 젠지(Genaration Z) 세대의 영향도 크다. 이들은 현존하는 최고의 학벌과 스팩 그리고 디지털 네이티브들이며, 기존의 수직적이고 오프라인 지향성의 업무문화를 수용하기 어려워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워케이션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성(gender)에 대한 인식도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간 성 경계가 허물어졌다. 사람을 남성(male)과 여성(female), 2개의 성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이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22년부터 미국 국무부가 발행하는 미국 여권에는 M, F 외에 X로 표시된 젠더 유형이 표기된다. X란 남, 녀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을 벗어난 또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성별 구분에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까지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제3의 성’을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LGBTQ의 5가지 세부 유형을 포함하고 있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쿼어 등의 ‘성소수자’들을 말하며 미국에서는 인구의 8%(약 3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같은 여권을 발행하는 나라들은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하여 호주, 뉴질랜드, 인도, 네팔 등이며 국가 수는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캐나다 여권 남, 녀, X표시

출처: Canada passport gender F Transportation Company Obligations; Guide for Transporters, Canada Border Services Agency Canada passport gender M Assistance with Canadian Passport Photos, Canada Passport Help Canada passport gender X 김용호, 성수자 여권 도입, 한국일보(The Korea Times Daily)

‘남녀 평등’과 ‘인권 향상’은 UN이 추구하는 17개 SDG(지속가능 발전 목표) 들이며 최근 ESG경영 에서도 S(사회) 부분의 핵심 가치로 전 세계 기업들의 뉴노멀(New Normal) 프랙티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는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이분적인 성 개념을 극복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성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젠더 분야 빅블러 현상을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다.

둘째, 기존 오프라인 경제와 인터넷 경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최근에는 가상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이들 경제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2008년 터치형 스마트폰의 보급,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바둑 대국, 2020년 글로벌 팬데믹 발생 등 일련의 주요 사건으로 실물경제와 인터넷 경제간 빅블러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지난 3년 팬데믹 기간 중 비대면 서비스 시장이 반강제로 급성장했다. 그 결과 이제 대부분의 국가에서 스마트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O2O 서비스가 일반화되었다. 온라인-오프라인의 경계를 잇는 O2O 서비스는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활발한 서비스 평가와 피드백을 통하여 온라인의 효율성과 오프라인의 실제감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

쿠팡의 경우 제품구색(selection), 저가격(price), 편의성(convenience) 즉 SPC라고 불리는 소매업의 3가지 덕목을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없이 동시에 달성하는 매직을 만들어 내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쿠팡은 소매 기업인가? 물류 기업인가? 정보 기술 (ICT) 기업인가? 통계청의 기존 표준산업분류(KSIC)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빅블러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3가지 기존 산업이 융화하여 산업간 경계를 무너뜨린 기업이 바로 한국형 아마존인 쿠팡이다. 쿠팡, 네이버, 배달의 민족 등 현재 한국인이 가장 많이 결제하는 빅 3 리테일 앱(App)들의 경우를 보면 모두 실물 경제와 인터넷 경제를 블러(blur)시킨 서비스들이다.

삼성전자도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DX(device experience)로 불리는 부서로 B2C 비지니스를 통칭하고 있다. 냉장고, 에어콘, TV 등 모든 가전이‘삼성전자 경험’이라는 고객 경험으로 인식되기 떄문이다. 기존의 오프라인 온리(only) 기업들도 고객들에게 어떻게 융합(blur)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고객경험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심해야 한다.

2023년 올해부터 스타벅스는 ‘스타벅스 오딧세이’ 서비스를 본격화한다고 한다. 오딧세이 서비스란 웹 2.0에 기반한 사이렌 서비스가 웹 3.0으로 발전한 것으로, 예를들어 스타벅스 커피 500잔을 마시면서 쌓아 올린 마일리지(스탭프)를 환전하여 멕시코 커피농장 투어 여행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말하는 것이다.

웹 3.0 시대가 개화되고 있다. 웹 2.0 에 비해서 고객 충성 데이터가 NFT로 저장되어 이체, 환전이 가능해진 서비스이다. 웹3.0이 발전하면 실물경제+ 인터넷 경제+ 가상경제 간 경계가 융화되는 빅블러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경제에서 코인으로 부를 축적하여 강남 아파트를 실제 구매하는 10대 부자들도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웹 3.0으로의 진화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셋째, 기존의 경제적 부가가치 사슬이 해체되고 있다. 제조업과 유통업 그리고 하드웨어 기업과 소프트웨어 기업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빅블러가 발생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유통(도매->소매)->소비를 연결하는 체인구조가 붕괴되고 있다.

나이키는 2020년 아마존과 결별을 선언한 후 D2C 혁명이라 불리는 빅블러를 주도하고 있다. 자사몰과 직영 전문점 그리고 라이브 커머스 등을 활용하여 제조업이 직접 소비자를 상대하여 전체매출의 30% 이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2025년까지 전체매출의 40% 이상을 D2C 채널을 통하여 판매한다는 목표를 보면 이것은 혁명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아마존, 쿠팡 같은 빅블러 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오프라인 소매업은 침체를 거듭하고 있다. 소매업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상가와 쇼핑몰의 부진은 리테일 테크 기업들의 성장에 기인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오프라인 소매업은 RaaS(Retail as a Service)라는 형태로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고 있다. 서비스형 리테일(RaaS) 이란 소매 매장에서 물건을 보여주면서 판매는 온라인 등으로 하는 서비스이다. 유통업체 보유 공간에서 공간, 물류, 고객정보 기술 등의 자산을 활용하여 입점 제조업체와 소매업체에게 B2B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테나형 매장을 말한다. 무신사의 경우도 홍대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방문고객들을 연구하고 무신사 브랜드 철학을 체험하는 방향으로 소매매장을 활용하고 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체험과 경험을, 온라인으로 판매 및 반품 서비스를 하는 역할 분담이 만들어지고 있다.

당근마켓의 경우 C2C라는 새로운 커머스를 만들어서 영리와 비영리간 경계를 허물고 있다. 커뮤니티와 소셜 그리고 커머스간 경계가 융화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네이버도 2022년 2조 3400억을 투자하여 미국의 당근마켓이라고 불리는 패션 플랫폼 ‘포쉬마크’를 인수했다. 네이버 창립이래 가장 큰 규모의 기업인수건으로 버티컬 플랫폼으로의 진화가 거센 글로벌 C2C 시장에 교두보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MZ세대 중심으로 C2C 쇼핑, 웹툰, K-pop 콘텐츠 등을 제공하여 차별화된 빅블러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우리는 ‘퍼머크라이시스’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 산업과 비즈니스의 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자기 객관화시켜서 관찰해보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사고와 오픈마인드가 절실히 필요하다. 빅블러 시대 ‘지금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유연성을 가지고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용구(숙명여자대학교 경영학부/경영전문대학원 교수)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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